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명성황후 민자영
불꽃처럼 나비처럼
내가 아는 명성황후 민자영은 정권을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 힘썼으며, 서양문물을 적절히 수용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라 알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사랑은 오직 고종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로 인해 명성황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나온 민자영역의 수애와 무명역의 조승우처럼 실제 역사가 그러하지는 않을지도 몰라도 민자영 또한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진실인 듯 하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이 비록 불분명하지만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무명이라는 호위무사가 민자영을 지킨 것만은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 명성황후의 초상화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후의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그는 실존인물인 홍계훈으로 영화에서는 무명이라는 인물로 나온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진실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한 정보는 찾지못하였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나는 진실이 궁금해진다. 모두들 그러한게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분명치가 않다. 모순이 많지만 원점은 항상 역사를 기준으로 픽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민자영 수애는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도발적이고 때론 지적이고 때론 카리스마적이었다.
무명 조승우는 화려한 액션을 보일 때나 벗었을 때?에는 정말 멋있었지만, 민자영 수애 앞에서만 서면 순수하다 못해 바보같기 까지 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조승우가 좀더 멋있어보였더라면 하는 점이다.
그리고 긴 역사적 사실을 두시간 이내에 끝내야 되는 단점으로 인해 정말로 민자영과 무명과의 사랑이야기로만 이야기가 꾸며져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사랑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명성황후에 대해 좀더 알게 되고 명성황후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조사까지 하게 만들어줘서 영화를 본 자체가 보람되었다.
조선최초로 전기불을 밝힌 여인 민자영,
뛰어난 침착성과 언제나 무엇을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여인
<서양 여성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 1883년>
우리나라에서 초콜릿을 가장 먼저 먹어본 여인 민자영,
서양식 코르셋을 최초로 입어보았던 여인 민자영,
왕비는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수려한 말솜씨는 실로 대단했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년>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
조선 최초의 전기불을 밝히고, 초콜렛의 달콤함과 와인 향에 매료되었던 명성황후 민자영.
" 후의 그림자... 한시도 후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요.."면 한없이 여리고 약한, 우리와 똑같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어디를 가든 그림자같이 그녀를 지키는 무명이라는 호위무사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연민이 느껴지고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초상화와 함께 발견된 프랑스 선교사 '이사벨'의 노트에서>
명성황후 민자영이 어떠한 인물인가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사실인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을 것이나, 민자영과 무명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보았다.
영화도 중요하지만, 그 영화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배경 또한 알아야 된다는 생각에 의해...
명성황후 민자영?
민자영의 이름은 민자영이 아니라 아영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설도 있다.
어릴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대원군파를 숙청한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어 궁궐을 탈출하고, 이 때 영화에서 무명이라 불리는 실존인물인 홍계훈 호위무사와 함께 사지에서 겨우 탈출하면서부터 동행하여 피난지 장후원에서 보낸 2개월 남짓, 정확히 51일을 민왕후와 홍계훈이 함께 보냈다고 한다. 앞날을 모르는 쫓기는 자의 불안과 두려움,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와중에서도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섬기는 미천한 신분의 호위무사 홍계훈의 면모를 자세히 살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는 의견이 있다.
아마도 이런 정황이 왕비와 호위무사의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영화로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많다. 민자영은 화개동 윤태준의 집을 거쳐 여러곳을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일어나 훈련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서 궁궐로 침입하려는 일본 낭인패를 저지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궁궐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고, 일본 장교의 칼을 맞은 다음 여덟 발의 총을 맞고 치명상을 입어 죽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일본 세력이 막강해지는 것을 느낀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접근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미우라 고로에 의해 민자영은 난자시해 당하고 만다.
왜 민자영은 지켜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까??
당시 궐 수비를 맡고 있는 수비군인 시위대와 훈련대가 있었는데 이중 훈련대는 일본 장교들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군 지휘권이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있다.
명성황후는 사진찍기를 거부했는데 어떻게 민자영을 일본군은 알아볼 수 있었을까??
<매천야록> 과 <대한계년사> 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고무라의 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희를 보고 있을 때 배우 가운데 종왜(친일성향의 인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한 국가의 국모를 비참하게 처치한 미우라 고로는??
미우라가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을미사변을 꾸미는게 실패하자 관련자 중 47명을 소환해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겼으나, 증거불충분이란 훌륭한 이름하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공식적인 일본 정부나 외교채널에서 이에대해서 이후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나 최근 그 낭인들의 후예들이 개인적으로 와서 묘소에 와서 참배하고 사죄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면 분명 일본세력이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민자영을 시해했음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 '명성황후 민자영'의 3색 매력을 볼 수 있는 영상
사랑스러운 민자영과 민자영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무명을 보고 싶다면~ 원츄!^^*
출처 : 불꽃처럼 나비처럼(사진 및 영상)
2009년 즐거운 추석, 나의 기록을 담는다..
싸이더스 9 시네마
10월 3일 토요일 오후4시 30분
with 동생
By. wing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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